지난달 국산 8비트기 자료를 뒤지다 SPC-1500 롬 세트를 다시 만났다. SPC-1000은 중고 시장에 종종 나오지만 그 후계기인 SPC-1500은 실물도 자료도 훨씬 귀하다. 몇 안 남은 문서와 에뮬레이터로만 만져볼 수 있는 기계라 오히려 정리해둘 값어치가 있다.
SPC-1500은 삼성전자가 1987년에 내놓은 Z80 기반 8비트 컴퓨터다. 이름은 SPC-1000의 후계지만 소프트웨어 호환은 전혀 없고, 실제로는 일본 샤프의 X1 시리즈를 상당 부분 그대로 옮긴 설계에 가깝다. 그래픽과 한글 처리를 크게 손봤지만 소프트웨어가 따라주지 못해 짧게 팔리고 사라진 기종이다.
SPC-1000의 뒤를 이었지만 완전히 다른 기계다
SPC-1000은 1980년대 초 국내 가정용 컴퓨터로 꽤 성공했다. SPC-1500은 그 상표를 물려받았을 뿐, 내부 설계는 다시 그렸다. 두 기계는 롬에 담긴 베이직 토큰이 달라 프로그램이 그대로 돌지 않는다. SPC-1500에는 SPC-1000용 베이직 데이터를 변환해 읽는 loadx 명령이 따로 있었는데, 토큰을 1:1로 바꿔주는 수준이라 대부분 손을 봐야 제대로 돌아갔다.
설계 원판은 샤프 X1이다. X1의 소프트웨어와 호환되지는 않지만 회로 구성은 90% 가까이 닮았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삼성이 SSE-1500V라는 자체 칩셋으로 한글 처리를 붙인 것이 국산화 지점이다.
사양 한눈에 보기
| 항목 | 내용 |
|---|---|
| 제조사 | 삼성전자 |
| 발표 | 1987년 |
| CPU | Zilog Z80A, 4MHz |
| ROM | 96KB |
| RAM | 122KB (뱅크 구성) |
| 그래픽 | 320x200 / 640x200, 8색 |
| 사운드 | General Instruments AY-3-8910, 3채널 8옥타브 |
| 저장장치 | 내장 카세트 데이터 레코더, 5.25인치 플로피(옵션) |
| 원판 | 샤프 X1 계열 설계 |
Z80A는 재믹스나 MSX에도 쓰인 8비트 CPU다. 같은 칩을 4MHz로 돌린다. RAM이 122KB로 적힌 것은 Z80이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64KB를 넘는데, 화면용 메모리와 뱅크를 합친 값으로 이해하면 된다. 발매가는 자료마다 값이 갈려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그래픽 강화와 SR-BASIC
SPC-1000 대비 가장 크게 손본 부분이 그래픽이다. 640x200 고해상도와 8색을 지원해, 문자 위주였던 전작보다 화면 표현의 폭이 넓어졌다. 롬에 담긴 내장 베이직은 SR-BASIC이라 불린다. 전원을 넣으면 바로 이 베이직 프롬프트로 떨어지고, LINE이나 CIRCLE 같은 그래픽 명령으로 640x200 화면에 곧장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사운드는 AY-3-8910을 얹어 3채널 8옥타브를 낸다. 이 칩은 MSX와 여러 8비트기가 함께 쓴 물건이라, 당시 8비트 게임음악의 질감을 그대로 낸다.
카세트와 디스크 구성
기본 저장장치는 본체에 붙은 카세트 데이터 레코더다. 프로그램을 오디오 테이프에 저장하고 불러오는 방식으로, 별도 드라이브 없이 바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자 한계였다. 로딩이 느리고 실패가 잦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옵션이었다. 속도와 편의는 카세트와 비교가 안 되지만 값이 비쌌다. 가정에서는 카세트로, 학교나 업무 용도에서는 디스크로 나뉘어 쓰였다.
소프트웨어 부족과 VDP 유닛
SPC-1500의 결정적 약점은 전용 소프트웨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공백을 메우려고 나온 것이 VDP 유닛이다. MSX1의 영상 칩 TMS9918을 담은 변환 장치로, 이걸 물리면 MSX용 롬팩을 SPC-1000/1500에서 돌릴 수 있었다. 자체 소프트웨어가 부족해 남의 생태계를 빌려 쓴 셈이다.
결국 1989년 교육용 PC 규격이 IBM PC 호환기종으로 정해지면서 삼성은 SPC-1500 사업에서 손을 뗐다. 애플 II 호환기와 MSX가 시장을 나눠 가진 상황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컸다.
수집가 관점: 구하기와 자료
SPC-1500은 판매 기간이 3년이 채 안 돼 남은 실물이 적다. 중고로 나오는 일이 드물고, 나와도 내장 데이터 레코더의 고무 벨트가 삭아 테이프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경우가 많다. 키보드는 텐키를 없애고 커서 키를 크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라 실물을 보면 배열이 낯설다.
자료는 나무위키의 SPC-1500 문서와 영문 NamuWiki가 정리가 가장 잘 돼 있다. 롬 이미지와 에뮬레이터 관련 논의는 MAME 저장소의 이슈에서 원저자가 남긴 개발 기록을 볼 수 있다.
오늘 다시 부팅하기: MAME의 spc1500 드라이버
실물이 없어도 SPC-1500은 에뮬레이터로 켤 수 있다. 국내 개발자 Miso Kim(@meesokim)이 2015년 말부터 MESS/MAME용 드라이버를 만들어 넣었고, 카세트 지원과 40/80칼럼 화면, 한글 입출력까지 단계적으로 붙였다. 이 드라이버는 MAME 0.170 무렵에 정식 반영됐고, 지금은 MAME 본체에 spc1500이라는 머신 이름으로 들어 있다.
부팅 절차는 다음과 같다. MAME를 설치하고, SPC-1500 롬 세트(spc1500.zip)를 roms 폴더에 넣은 뒤 머신을 지정해 실행한다.
# macOS는 Homebrew로 설치 brew install mame # 롬 세트를 roms 디렉터리에 둔 상태에서 실행 mame spc1500 # 카세트 이미지를 물려서 부팅하기 mame spc1500 -cass mygame.tap
전원을 넣으면 SR-BASIC 프롬프트가 뜬다. 카세트 이미지를 물렸다면 SR-BASIC의 로드 명령으로 테이프를 읽어 들이면 된다. MAME는 UI에서 카세트 재생/정지를 직접 조작할 수 있으니, 로딩이 안 되면 테이프 모터 상태부터 확인한다.
MAME 외에 MySPC라는 국산 전용 에뮬레이터도 있다. MAME는 정확도와 유지보수가 강점이고, MySPC는 SPC-1500만 겨냥해 가볍게 돌려보기 좋다. 롬 이미지 자체는 저작권이 남아 있으니 배포처를 잘 살펴서 구하는 편이 안전하다. 옛 문서와 스캔 자료는 archive.org에서 한국 8비트 관련 아카이브를 검색하면 조금씩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