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삵
Hardware

Psion Series 5와 심비안의 뿌리

동동교동삼거리·2026년 10월 1일·조회 1

휴대용 기기 서랍을 뒤지다 보면 유독 뚜껑을 열 때 기분 좋은 물건이 있다. Psion Series 5가 그렇다. 화면을 뒤로 밀면 키보드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구조라, 접힌 상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의 자판이 나타난다. 1990년대 후반 영국에서 나온 이 PDA는 지금 기준으로도 입력 장치 설계가 재미있다.

사이언 시리즈 5 PDA (1997)
사이언 시리즈 5 PDA (1997). 사진: Gareth Halfacree from Bradford, UK, CC BY-SA 2.0, 위키미디어 커먼즈

Psion Series 5는 1997년 6월 영국 Psion이 발표한 PDA다. PDA는 Personal Digital Assistant, 즉 일정과 메모를 다루는 손바닥 크기의 휴대용 컴퓨터를 말한다. 기억할 만한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실사용 가능한 슬라이딩 키보드, 다른 하나는 이 기기에 실린 운영체제 EPOC32가 나중에 심비안(Symbian) OS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2000년대 피처폰 상당수가 돌리던 그 OS의 뿌리가 여기 있다.

1997년, 손안에 들어온 ARM 컴퓨터

Psion은 1980년 설립된 영국 회사로, 1980년대부터 Organiser 같은 휴대용 기기를 만들어 왔다. Series 3 계열로 쌓은 경험 위에서 Series 5는 32비트로 넘어간 첫 세대다. CPU는 ARM7 계열을 썼다. ARM은 저전력에 강한 명령어 집합으로, 지금 스마트폰 칩의 조상 격이다. 당시 Palm Pilot이 모토로라 드래곤볼(68k 계열)로 가볍게 승부했다면, Psion은 물리 키보드를 단 작은 작업 도구 쪽을 노렸다.

구동 OS는 EPOC32다. Psion이 1990년대 중반부터 C++로 새로 작성한 32비트 운영체제로,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ARM 지원을 갖췄다. Series 5에는 EPOC Release 1 세대가 올라갔고, 2년 뒤 Series 5mx에는 EPOC Release 5(ER5)가 실렸다.

슬라이딩 키보드가 이 기기의 핵심이다

Series 5의 설계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키보드다. 화면 아래에 접혀 있던 자판이, 화면을 열면 무게 중심을 잡아 주기 위해 본체 앞쪽으로 미끄러져 나온다. 덕분에 책상에 올려놓고 열어도 뒤로 넘어가지 않는다. 키도 작은 기기치고는 눌리는 느낌이 분명해서, 실물을 만져 보면 왜 이 기종을 쓰던 사람들이 지금도 자판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다.

화면은 5.6인치 640 x 240 흑백 LCD로, 16단계 명암과 백라이트, 터치 입력을 지원했다. 색은 없지만 해상도가 넉넉해서 텍스트 작업에 쓸 만했다. 전원은 AA 건전지 2개다. 요즘 리튬 내장 기기와 달리, 배터리가 떨어져도 편의점에서 해결되는 설계는 지금 봐도 실용적이다.

주요 사양

항목Series 5 (1997)Series 5mx (1999)
CPUARM7 계열 Cirrus Logic CL-PS7110ARM7 계열, 36MHz
클럭18MHz36MHz
RAM4 / 8MB최대 16MB
화면5.6인치 640 x 240, 16단계 흑백, 터치, 백라이트
OSEPOC32 (ER1 세대)EPOC32 ER5
전원AA 2개, 약 10~20시간 사용
크기 / 무게170 x 90 x 23mm, 354g (배터리 포함)
발표1997년 6월1999년

칩셋 표기는 레퍼런스마다 엇갈린다. 위키피디아 인포박스는 두 모델 모두 CL-PS7110으로 적고 클럭만 18MHz와 36MHz로 구분한다. 반면 널리 인용되는 사양표들은 5mx를 CL-PS7111로 표기한다. 단일 출처로 확정하기 어려워 여기서는 위키피디아 표기를 따르되 차이를 밝혀 둔다.

1997년 Series 5부터 2001년 Nokia 9210까지 EPOC이 심비안으로 이어지는 연표
Psion의 EPOC32 코드베이스가 Symbian OS 브랜드로 이어진 과정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EPOC에서 심비안으로

Series 5가 기억되는 진짜 이유는 OS의 혈통이다. 1998년 6월 Psion의 소프트웨어 부문이 Nokia, Ericsson, Motorola와의 합작으로 분사하면서 Symbian Ltd.가 됐다. 이 합작사가 가져간 코드베이스가 바로 EPOC32다.

이후 전개를 연도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EPOC Release 5.1을 처음 탑재해 출하된 기기는 2000년 Ericsson R380 스마트폰이다. 'Symbian OS'라는 이름으로 브랜딩된 버전이 처음 실린 기기는 그다음으로, 2001년 6월에 나온 Nokia 9210 Communicator이며 Symbian OS v6.0을 돌렸다. 즉 EPOC이라는 이름으로 출하된 마지막 세대와 Symbian이라는 이름의 첫 세대 사이에 Series 5mx의 ER5가 끼어 있는 셈이다.

Series 5를 켜 보면 2000년대 심비안 폰을 쓰던 감각이 어렴풋이 겹친다. 같은 설계 철학이 스크린만 작아진 채로 수억 대의 휴대폰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이 PDA가 단순한 흑백 메모 기기 이상으로 보인다.

수집가 관점에서 본 Series 5

중고 매물은 유럽 쪽 경매 사이트에 꾸준히 올라온다. 구하기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상태가 문제다. 가장 흔한 고장은 화면과 본체를 잇는 플렉스 케이블이다. 화면을 여닫는 힌지 근처로 케이블이 지나가는 구조라, 오래 쓰면 세로줄이 생기거나 화면이 아예 안 나온다. 매물 사진에서 화면 줄 유무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 좋다.

초기 Series 5는 플라스틱 힌지와 도금 접점이 약해, 5mx 쪽이 내구성과 속도 모두 낫다는 평이 많다. 실사용 목적이라면 5mx를 권한다. 전원이 AA라 배터리 누액으로 접점이 부식된 개체도 흔하니 배터리실 상태도 봐야 한다.

에뮬레이터로 오늘 다시 켜보기

실물 없이 EPOC을 체험하는 가장 쉬운 길은 Psion이 배포하던 ER5 SDK에 들어 있는 에뮬레이터다. 이 에뮬레이터는 ARM CPU를 흉내 내는 방식이 아니라, WINS라고 부르는 EPOC API 재구현을 Windows 위에서 돌린다. EPOC의 각 프로세스가 WINS 샌드박스 안의 스레드로 실행되는 구조라, 실제 하드웨어 롬 없이도 데스크톱 OS를 띄울 수 있다.

SDK는 원래 Windows NT용이지만 Windows 95/98/ME/XP에서도 돌고, 리눅스에서는 Wine으로 실행하는 사례가 있다. SDK 아카이브와 설치 안내는 filesaveas.com의 Psion 에뮬레이터 페이지에 정리돼 있다.

진짜 ARM 하드웨어 거동까지 재현하려는 프로젝트도 있다. Ninji의 "16 Shades of Grey"는 CL-PS7110 수준의 하드웨어를 직접 에뮬레이트해 EPOC 롬을 부팅하는 과정을 기록한 글로, WINS와 달리 바닥부터 올라오는 접근을 보여 준다. 함께 읽으면 이 기기가 어떤 칩 위에서 돌았는지 감이 잡힌다.

관련 자료는 archive.org에 Psion SDK와 소프트웨어가 보존돼 있고, Psion 커뮤니티 소프트웨어 색인도 유지되고 있다. 실물 한 대를 구하기 전에 에뮬레이터로 EPOC의 작업 공간과 자판 배치부터 만져 보기를 권한다.

자주 묻는 질문

Psion Series 5는 언제, 어디서 나왔나?

영국 Psion이 1997년 6월에 발표한 PDA다. 32비트 ARM7 계열 CPU와 EPOC32 운영체제를 썼고, 화면을 밀면 키보드가 앞으로 나오는 슬라이딩 구조가 특징이다. 1999년에는 클럭을 높이고 메모리를 늘린 Series 5mx가 나왔다.

EPOC과 심비안(Symbian) OS는 어떤 관계인가?

EPOC32는 Psion이 만든 32비트 운영체제로, Series 5에 처음 실렸다. 1998년 6월 Psion 소프트웨어 부문이 Nokia, Ericsson, Motorola와 합작해 Symbian Ltd.가 됐고, 이 회사가 EPOC 코드베이스를 이어받았다. 이후 세대가 Symbian OS로 브랜딩됐다.

심비안 OS를 처음 탑재한 기기는 무엇인가?

'Symbian OS'로 브랜딩된 버전을 처음 실은 기기는 2001년 6월 출시된 Nokia 9210 Communicator로, Symbian OS v6.0을 돌렸다. 그 전인 2000년에는 EPOC Release 5.1을 탑재한 Ericsson R380이 먼저 출하됐다.

Series 5와 5mx 중 무엇을 사는 게 좋나?

실사용 목적이라면 5mx를 권한다. 클럭이 18MHz에서 36MHz로 올랐고 메모리도 최대 16MB까지 늘어 반응이 빠르며, 힌지와 접점 내구성도 초기 Series 5보다 낫다는 평이 많다.

지금 EPOC을 PC에서 돌려볼 수 있나?

가능하다. Psion이 배포한 ER5 SDK에 포함된 에뮬레이터는 ARM CPU를 흉내 내는 대신 WINS라는 EPOC API 재구현을 Windows 위에서 실행한다. 리눅스에서는 Wine으로도 돌릴 수 있다. 하드웨어 수준 재현을 보려면 별도 에뮬레이터 프로젝트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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