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2000을 다룰 때 국산 MSX2 이야기를 하다가, 같은 대우전자가 그 MSX2를 게임기로 다시 포장해 팔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 못했다. 재믹스 슈퍼V가 그 물건이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컴퓨터는 부담스럽지만 오락실 게임은 집에서 하고 싶던 시절의 절충안이었다.
재믹스 슈퍼V(모델명 CPC-61)는 대우전자가 만든 MSX2 규격의 카트리지 전용 게임기다. 키보드와 디스크 드라이브를 걷어내고 게임팩만 꽂으면 되도록 단순화한 대신, 속은 MSX2 컴퓨터 그대로다. 그래서 MSX1은 물론 MSX2 전용 게임과 메가롬(용량을 키운 대용량 카트리지)까지 돌아간다는 점이 이 기기를 기억할 이유다.
재믹스는 컴퓨터가 아니라 게임기 브랜드였다
재믹스(Zemmix)는 대우전자가 MSX 본체에서 키보드를 빼고 게임기 형태로 내놓은 제품군의 브랜드다. MSX는 1983년 일본에서 시작된 8비트 컴퓨터 공통 규격으로, 여러 회사가 같은 규격의 기계를 만들어 소프트웨어를 공유했다. 대우는 아이큐(IQ) 시리즈로 MSX 컴퓨터를 팔면서, 같은 하드웨어를 게임기로 재포장해 재믹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모델명 | 제품명 | 규격 |
|---|---|---|
| CPC-50 | 재믹스 | MSX1 |
| CPC-51 | 재믹스 V | MSX1 |
| CPC-61 | 재믹스 슈퍼V | MSX2 |
| CPG-120 | 재믹스 터보 | MSX2+ |
슈퍼V는 이 줄에서 MSX2로 올라선 세대다. 재믹스 제품군은 한국에서 대략 1985년부터 1995년 사이에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슈퍼V는 그 중간인 1990년 무렵 재믹스 V의 후속으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MSX2+ 규격의 재믹스 터보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사양은 MSX2 컴퓨터, 껍데기는 게임기
슈퍼V의 속은 표준 MSX2다. 게임기라고 별도의 칩셋을 쓴 게 아니라, 당대 MSX2가 공유하던 부품을 그대로 담았다.
- CPU: 자일로그 Z80 계열 8비트 프로세서, 3.58MHz (MSX 표준 클럭)
- VDP(영상 처리 칩): 야마하 V9938 - MSX2의 화면을 담당하는 칩으로, 최대 512색 팔레트에서 16색을 골라 쓰는 그래픽과 하드웨어 스크롤을 지원한다
- 사운드: MSX 표준 PSG(AY-3-8910 호환), 3음 + 잡음
- 카트리지 슬롯: 1개 (게임팩과 확장 기기가 이 하나를 나눠 쓴다)
- 영상 출력: NTSC, TV 연결용 저/고주파 출력
- 기본 동봉: CPJ-600 게임패드 1개
- 색상: 흰색 계열 CPC-61W, 검정 계열 CPC-61B
재미있는 설계 포인트가 하나 있다. 슈퍼V의 내장 BASIC에는 SCREEN 9라는 텍스트 모드가 들어 있다. 이건 표준 MSX2에 없는 대우만의 추가 모드로, 그래픽 화면(SCREEN 5, 6)을 기반으로 한글 문자를 표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게임기라면서도 한글 표시를 위한 배려가 롬 안에 남아 있는 셈이다.
키보드가 필요하면 전용 키보드 CPK-30을 붙일 수 있고, 디스크 드라이브 인터페이스도 달 수 있다. 단 슬롯이 하나뿐이라 확장 기기를 꽂으면 그동안 게임팩은 못 꽂는다. 게임기로 쓰라고 단순화한 구조가 확장에서는 발목을 잡는다.
수집가 관점: 컨트롤러가 약점이다
슈퍼V를 실물로 구할 때 가장 자주 지적되는 부분이 동봉 게임패드 CPJ-600이다. 조이스틱에서 조이패드로 바뀌면서 방향키가 MSX식 분할형 십자키 모양이 됐는데, 조작감이 좋지 않고 내구성도 약하다는 평이 많다. 본체는 멀쩡한데 패드만 고장난 매물을 흔히 만난다. MSX용 조이스틱이나 패드는 규격이 같으니 다른 컨트롤러로 대체해서 쓰면 된다.
정식 발매 게임팩은 구하기가 어렵다. 대우가 자낙 EX, 퀸플 같은 인기작을 정식 라이선스로 내려는 시도를 했지만 물량이 많지 않아, 지금은 정품 국내 발매판 자체가 수집 대상이다. 실기와 정품 게임팩을 다 갖추려면 품이 든다.
전원부와 접점도 확인할 부분이다. 30년 넘은 기기이니 카트리지 슬롯 접점 산화로 인식이 불안정한 경우가 있다. 무수 알코올로 단자를 닦는 정도로 개선되는 일이 많다.
지금 돌려보기: openMSX로 슈퍼V 재현하기
실기가 없어도 슈퍼V의 동작은 에뮬레이터로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MSX 에뮬레이터 중 정확도가 높은 openMSX는 슈퍼V에 정확히 대응하는 머신 구성 Daewoo_CPC-61_Zemmix_Super_V를 기본 제공한다. 아래는 리눅스나 macOS 기준이다.
1. openMSX를 설치한다. macOS는 Homebrew, 데비안/우분투 계열은 패키지 관리자로 받을 수 있다.
# macOS brew install openmsx # Debian / Ubuntu sudo apt install openmsx
2. 설치된 머신 목록을 확인한다. openMSX에는 머신 목록만 뽑아주는 전용 옵션이 따로 없다. 전체 옵션과 함께 -h로 확인하거나, GUI에서 상단 메뉴의 Machine 항목을 연다.
# 명령행 도움말과 사용 가능한 항목 확인 openmsx -h # GUI에서는 상단 메뉴 Machine -> Select MSX machine 로 목록 확인
3. 슈퍼V 머신으로 게임 롬을 꽂아 실행한다. -machine으로 기종을, -cart로 카트리지 롬을 지정한다.
openmsx -machine Daewoo_CPC-61_Zemmix_Super_V -cart game.rom
메가롬 게임이 매퍼(대용량 롬을 나눠 읽는 방식) 자동 인식이 안 되면 -romtype으로 매퍼를 지정한다. 코나미 게임이라면 다음처럼 쓴다.
openmsx -machine Daewoo_CPC-61_Zemmix_Super_V game.rom -romtype Konami
머신 구성이 동작하려면 해당 기종의 시스템 롬(BIOS 등)이 필요하다. openMSX는 자유 배포 가능한 C-BIOS를 기본 포함하지만, 슈퍼V 고유 롬은 저작권이 남아 있어 배포판에 들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실기에서 덤프한 롬을 직접 넣어야 한다.
더 파보고 싶다면 MSX Resource Center(msx.org)의 위키와 포럼에 기종별 시스템 롬 정보와 openMSX 설정 논의가 쌓여 있다. Generation MSX(generation-msx.nl)의 하드웨어 데이터베이스도 재믹스 각 모델의 사진과 사양을 확인하기 좋다. 소프트웨어와 매뉴얼 스캔 자료는 archive.org에서도 MSX 컬렉션으로 찾을 수 있다.
왜 기억할 만한가
슈퍼V는 컴퓨터를 게임기 가격과 형태로 낮춰, MSX2 소프트웨어 자산을 오락 목적으로 개방한 국산 기기다. 성능이 특출나서가 아니라, 같은 하드웨어를 컴퓨터로도 게임기로도 팔던 MSX 생태계의 한 단면을 국내 사정에 맞게 보여주는 물건이라 남는다. 에뮬레이터로라도 슈퍼V 머신을 골라 게임팩을 꽂아보면, 8비트 시절 대우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손끝으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