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창고를 정리하다 코모도어 주변기기 몇 개가 나왔는데, 정작 본체인 VIC-20은 없었다. 아쉬운 김에 에뮬레이터로라도 다시 켜보니, 3.5KB라는 메모리로 이 기계가 어떻게 100만 대를 팔았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VIC-20은 코모도어가 1980년에 발표하고 1981년부터 전 세계에 판 8비트 홈컴퓨터다. 300달러 밑으로 가격을 끌어내려 거실로 들어온 첫 세대이고, 어떤 기준으로 보든 컴퓨터가 100만 대를 넘긴 최초의 기종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기억할 만한 이유는 두 가지다. 영상과 사운드를 한 칩에 몰아넣은 VIC 칩의 설계, 그리고 그 칩이 가져간 자리 때문에 BASIC에 3.5KB만 남긴 메모리 구조다.
300달러짜리 컴퓨터가 나온 맥락
1980년 전후의 홈컴퓨터는 애플 II나 TRS-80처럼 1000달러를 넘나드는 물건이었다. 코모도어는 자사가 설계한 MOS 6502 CPU와 영상 칩을 직접 만든다는 이점을 살려 가격을 공격적으로 내렸다. 발표 당시 미국 정가는 US$299.95였다.
독일 시장에서는 이름이 VC-20이었다. 'VIC'이 독일어로 부정적으로 들린다는 이유로 'VolksComputer(국민 컴퓨터)'를 연상시키는 쪽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1980년에 먼저 나왔고, 미국과 유럽에는 1981년에 본격적으로 풀렸다.
주요 사양
| 항목 | 내용 |
|---|---|
| 발표 | 1980년 (미국/유럽 본격 판매 1981년) |
| 단종 | 1985년 1월 |
| CPU | MOS 6502, 1.108MHz(PAL) / 1.02MHz(NTSC) |
| 영상/사운드 칩 | MOS VIC (NTSC 6560 / PAL 6561) |
| ROM | 20KB |
| RAM | 5KB (BASIC 가용 3.5KB), 최대 32KB 확장 |
| 화면 | 176 x 184, 22열 x 23행, 16색 팔레트 |
| 발매가 | US$299.95 |
| 판매량 | 100만 대 돌파 최초, 누적 약 250만 대로 알려짐 |
VIC 칩이 영상과 사운드를 혼자 맡는다
VIC(Video Interface Chip)은 이름 그대로 화면을 그리는 칩인데, VIC-20에서는 영상뿐 아니라 사운드와 아날로그 입력(게임 패들 등)까지 함께 처리한다. 한 칩에 기능을 몰아넣어 부품 수와 단가를 줄인 설계다.
화면은 22열 23행의 텍스트 격자를 기준으로 하고, 캐릭터를 재정의해 그래픽을 표현한다. 요즘 눈으로 보면 22열은 답답할 만큼 좁지만, TV의 컬러 신호 특성에 맞춰 글자가 번지지 않게 고른 폭이다. 색은 16색 팔레트를 쓴다.
CPU는 6502다. 애플 II와 같은 계열이고, 뒤에 나온 C64는 6502의 변형인 6510을 쓴다. 클럭은 1MHz 남짓으로, 같은 시기 8비트 기종과 비슷한 수준이다.
왜 3.5KB뿐인가
VIC-20의 가장 큰 제약은 RAM이다. 전체 5KB 중 BASIC 프로그램과 변수에 쓸 수 있는 공간은 3.5KB다. 나머지는 화면 메모리와 시스템 영역이 가져간다. BASIC으로 조금만 긴 프로그램을 짜도 금방 OUT OF MEMORY ERROR를 만난다.
그래서 VIC-20은 확장이 사실상 필수였다. 본체 뒤의 확장 슬롯에 메모리 카트리지를 꽂으면 BASIC 가용 공간이 최대 27.5KB까지 늘어난다. 문제는 메모리를 늘리면 BASIC이 쓰는 주소 배치가 바뀌어서, 특정 확장 용량을 전제로 만든 프로그램은 그 용량에서만 제대로 돈다는 점이다. 에뮬레이터에서도 이 점은 똑같이 재현되므로, 돌리려는 소프트웨어가 요구하는 메모리 크기를 맞춰줘야 한다.
경쟁작과 비교
VIC-20의 맞상대는 Atari 400, TI-99/4A, 그리고 뒤이어 코모도어가 직접 내놓은 C64였다. Atari 400은 멤브레인 키보드로 입력감이 나빴고, VIC-20은 풀 사이즈 타자기 키보드를 달아 가격대 대비 입력 경험이 좋았다. 대신 화면 폭(22열)과 메모리에서는 경쟁작에 밀렸다.
결국 VIC-20을 끌어내린 것은 같은 집안의 C64였다. 1982년에 나온 C64는 64KB RAM과 VIC-II, SID 사운드 칩으로 모든 면에서 앞섰고, 가격도 빠르게 내려왔다. VIC-20은 1985년 1월에 단종된다.
수집가 관점
실물은 지금도 비교적 구하기 쉬운 편이다. 워낙 많이 팔린 기종이라 중고 매물이 꾸준하다. 다만 상태 좋은 전원 어댑터와 확장 메모리 카트리지는 본체보다 귀한 경우가 있다.
전원은 전 모델이 외장 트랜스포머 브릭을 쓴다. 다만 초기형(2핀 커넥터)은 브릭이 9V 교류만 내보내고 5V 정전압 regulation을 본체 메인보드에서 처리했고, 후기형(DIN 커넥터, 리비전 C)은 브릭 쪽에서 9V 교류와 정전압 5V 직류를 함께 공급해 본체의 발열 부담을 줄였다. 커넥터 모양과 리비전이 섞여 있으니, 어댑터를 구할 때는 본체 리비전에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흔한 고장은 다른 8비트 코모도어와 비슷하다. 전해 커패시터 노화, 키보드 접점 불량, 그리고 간혹 VIC 칩이나 RAM 칩 자체의 고장이 있다. 칩이 소켓에 꽂혀 있는 개체는 교체가 수월한 편이다.
VICE의 xvic으로 돌려보기
실물이 없어도 VICE(Versatile Commodore Emulator)로 충분히 만져볼 수 있다. VICE는 코모도어 8비트 전 기종을 에뮬레이트하는데, VIC-20 전용 바이너리가 xvic이다.
PRG 파일(디스크에서 추출한 실행 프로그램 이미지)은 autostart 옵션으로 바로 올린다. 메모리 확장이 필요한 타이틀이면 -memory로 용량을 함께 지정한다.
# PRG 자동 실행 xvic -autostart game.prg # 8KB 확장을 전제로 만든 PRG xvic -memory 8k -autostart game.prg
카트리지 이미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표준 4KB/8KB 카트리지는 autostart로 바로 붙는 smart attach가 먹는다. 특정 블록 주소에 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블록을 직접 지정하는 옵션(-cartgeneric 등)으로 붙인다.
# 표준 카트리지 자동 실행 xvic -autostart game.crt # 제네릭 카트리지 이미지 지정 xvic -cartgeneric game.bin
GUI에서는 Smart attach 메뉴로 PRG와 카트리지를 똑같이 올릴 수 있다. 옵션별 정확한 동작과 autostart 모드(가상 파일시스템, RAM 주입, D64 복사)는 VICE 공식 매뉴얼의 invoking the emulators 및 settings 장에 정리돼 있다.
소프트웨어와 디스크 이미지는 archive.org의 코모도어 컬렉션과 커뮤니티 위키 Denial(sleepingelephant.com)에서 찾을 수 있다. Denial은 VIC-20 전용 포럼과 위키라 전원부, 카트리지, 확장 메모리 같은 세부 자료가 특히 잘 정리돼 있다.